1992년 만화책으로는 유일하게 퓰리처상을 수상한 『쥐』. 2010년에 미국에서는 발간 20주년을 기념하여 1, 2권을 묶어 『THE COMPLETE MOUS』를 발간하게 되었다. 그것도 만화로서는 드물게 하드커버의 고급스런 장정과 만화답지 않게 예술적인 표지 디자인으로 제작되었다.
만화가들은 『쥐』가 개척한 만화의 새로운 가능성, 새로운 영역에 ‘그래픽 노블’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1992년에 『쥐』가 코믹북 사상 유례가 없는 퓰리처상을 수상하자, 이 새로운 흐름은 만화 문화에서 돌이킬 수 없는 분명한 조류의 하나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래서 미국에서 『쥐』가 발간 20주년을 맞아 그 예술성에 걸맞는 고급스런 외관을 하고 합본판이 발간되었을 때, 이를 어색하게 여기는 사람은 더 이상 없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쥐』한국어판이 발간되고 난 이후의 상황도 비록 미국보다 몇 년 뒤처지긴 했지만, 유사하게 전개되었다. 만화책 전문 출판사가 아닌 출판사들에서 해외작가나 국내작가의 작품성 있는 단행본 만화들이 발간되기도 하고, 또 우리나라 만화계에도 그래픽 노블이라는 분야가 형성되기 시작하여, 이미 여러 편의 작품과 작가들이 대중들에게 이름을 알려가고 있다.
수상 :1992년 퓰리처상 최근작 :<쥐 The Complete Maus 합본> ,<메타 마우스> ,<브레이크다운스> … 총 117종 (모두보기) 소개 :1948년 2월 15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태어났다. 뉴욕 주립 대학교 빙엄턴 캠퍼스를 중퇴한 뒤 언더그라운드 만화계에서 활동했고, 1977년 프랑스 출신의 건축학도 프랑소와즈 몰리를 만나 결혼해 슬하에 두 아이를 두었다. 『쥐』로 루카 페스티벌 최우수 외국작가상(1982년), 앙굴렘 국제 만화 축제 최우수 만화상(1988년, 1993년), 퓰리처상(1992년)을 수상했다. 그의 작품은 《뉴욕 타임스》, 《플레이보이》, 《빌리지 보이스》 등의 매체에 발표되었고, 또한 많은 박물관에 예술품으로 전시되었다. 현재 뉴욕 스쿨 오브 비주얼 아트(School of Visual Arts)의 교수로서 뉴욕에서 살고 있으며, 9.11 테러를 전후해 자신의 가족들이 겪었던 일을 만화로 그린 『사라진 건물의 그림자(In the Shadow of No Towers)』, 풍선껌 카드에서 리소그래피, 스테인드 글라스까지 자신의 작품 활동을 집대성한 『코믹스(Co-Mix: A Retrospective of Comics, Graphics, and Scraps)』를 발표하는 등 여전히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다.
최근작 : … 총 5종 (모두보기) 소개 :고려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서 공무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계속 수학 중이며 번역 프로젝트를 꾸준히 맡아왔다.
최근작 : … 총 4종 (모두보기) 소개 :중앙대학교 영어교육과를 졸업하고 현재 정부기관, 기업체의 프리랜서 영어통역사를 활동하고 있다. 다수의 영문 스피치를 비롯한 영역 중심의 번역 작업, 영어 교재 저작과 편집을 하고 있다.
퓰리처상, 구겐하임상,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수상작!
한우리독서문화운동본부, 중앙독서교육원 필독도서,
전국 대형서점 20년 연속 스테디셀러!!
그래픽 노블의 영원한 고전 『쥐』합본판 드디어 발간!!
1992년 만화책으로는 유일하게 퓰리처상을 수상한 『쥐』가 1, 2 두 권으로 우리나라에 처음 출간된 것은 1994년이어서 올해로 발간 20주년을 맞는다.
미국에서 <RAW>지에 연재되던『쥐 1』이 8년 간의 작업 끝에 단행본으로 발간된 것은 1986년이고, 『쥐 2』는 그로부터 6년 후인 1991년에 발간되었다. 그리고 다시 2010년에 미국에서는 발간 20주년을 기념하여 1, 2권을 묶어 『THE COMPLETE MOUS』를 발간하게 되었다. 그것도 만화로서는 드물게 하드커버의 고급스런 장정과 만화답지 않게 예술적인 표지 디자인으로!
사실 이런 형태의 변화는『쥐』라는 만화 하나가 미국 만화계와 전세계 만화 문화에 끼친 엄청난 영향의 결과를 잘 보여준다.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미국에서도 『쥐』1, 2권이 발간될 당시만 해도 만화는 대중이 접근하기 쉬워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큰 경우라 해도, 결국은 허황된 이야기, 우스갯소리, 혹은 풍자 등을 통해 대중의 말초적인 감성을 자극하는 하류문화, 저급한 대중문화의 하나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아트 슈피겔만이라는 한 젊은 만화가가 14년 간 공을 들여 그린 『쥐』라는 만화가 나오자 만화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변하기 시작했다. 분명히 만화인데도 어떤 다큐멘터리나 실화보다 더 사실적이었고, 어떤 소설이나 영화, 예술작품보다 더 섬세하면서도 묵직한 감동을 주었기 때문이다.
만화가들은 『쥐』가 개척한 만화의 새로운 가능성, 새로운 영역에 ‘그래픽 노블’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1992년에 『쥐』가 코믹북 사상 유례가 없는 퓰리처상을 수상하자, 이 새로운 흐름은 만화 문화에서 돌이킬 수 없는 분명한 조류의 하나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래서 미국에서 『쥐』가 발간 20주년을 맞아 그 예술성에 걸맞는 고급스런 외관을 하고 합본판이 발간되었을 때, 이를 어색하게 여기는 사람은 더 이상 없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쥐』한국어판이 발간되고 난 이후의 상황도 비록 미국보다 몇 년 뒤처지긴 했지만, 유사하게 전개되었다. 만화책 전문 출판사가 아닌 출판사들에서 해외작가나 국내작가의 작품성 있는 단행본 만화들이 발간되기도 하고, 또 우리나라 만화계에도 그래픽 노블이라는 분야가 형성되기 시작하여, 이미 여러 편의 작품과 작가들이 대중들에게 이름을 알려가고 있다.
그리고 이제 『쥐』는 한국어판 발간 20주년을 맞게 되었다. 출판사는 오래도록 소장할 수 있고, 『쥐』의 작품성을 충분히 구현할 수 있는 새로운 합본 판형으로 개정하는 것이 그간 『쥐』를 사랑하고 아껴준 우리나라 애독자들의 고마움에 답하는 방법이라 생각하여, 이번에 새로운 개정판 『쥐 : THE COMPLETE MOUS』를 발간하게 되었다.
아름드리미디어 출판사는 원서의 원형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애쓴 이 합본판이 아무쪼록 『쥐』의 작품성과 예술성을 최대한 살려주면서, 독자들에게 더 큰 감동으로 다가가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책소개]
1. 만화책 유일 퓰리처상 수상작 『쥐 : 한 생존자의 이야기』
만화에 대한 종래의 선입견을 깬 작품!
홀로코스트를 다룬 최고의 예술작품으로 손꼽히는 만화!
유태인 출신이면서 동시에 유태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온몸으로 거부하는 작가 슈피겔만은 독일의 구겐하임상, 미국의 퓰리처상,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을 수상한 이 작품에서 아우슈비츠의 끔찍한 대학살 속에서도 살아남은 아버지의 기구한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그의 이야기 속에서 유태인은 단순한 대학살의 피해자, 나찌는 가해자가 아니다.
사실 이 만화는 두 개의 이야기를 유기적으로 엮은 소설적 구성으로 꾸며졌다. 하나는 죽음의 올가미를 구사일생으로 빠져나온 아버지 ‘블라덱 슈피겔만’의 피맺힌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작가인 아들과 극한 상황을 경험한 아버지가 빚어내는 가치관과 생활양식의 충돌에 관한 일상이다. 작가는 두 개의 플롯을 긴밀하게 뒤섞음으로써 홀로코스트의 참혹했던 기억을 구체적으로 현재화하는 효과를 창출한다.
경제적 성공을 바라는 아버지의 요구를 거부하고 그림을 택한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살면 자신이 살아남지 못할 거라고 생각할 정도로 아버지를 못 견뎌한다. 그런 아들이 어머니의 갑작스런 자살 후 죄의식 속에서 방황하다 아버지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시도로 아버지의 아우슈비츠 경험을 만화로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이런 새로운 표현 양식을 설계하고 실험적인 기법으로 『쥐』를 탈고하기까지 아트 슈피겔만은 14년이라는 긴 세월을 소요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슈피겔만은 만화라는 대중문화를 예술적 표현 양식의 하나로 끌어올린 ‘그래픽 노블’의 창시자가 되었다.
또 하나 이 책의 표현 양식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유태인이 쥐로, 독일인이 고양이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알다시피 인류 역사에서 쥐란 동물에게 관대했던 문화는 그리 많지 않다. 다시 말해 전세계 다수인들에게 쥐는 당연히 박멸시키고 멸종시켜야 할 해충과 같은 존재, 존재 자체가 ‘악’으로 터부시되어 온 생물종이다. 그래서 나치가 유대인들에게 인간의 이미지를 부정하고 쥐의 이미지를 덮씌운 것은 한 인종의 존재를 손쉽게 말살할 수 있는, 인종주의자들의 효과적인 심리전술이라 할 것이다.
작가는 이 만화에서 유대인을 쥐로, 독일인을 고양이로 묘사함으로써 사람들이 인종주의자들의 이런 심리전술에 얼마나 무력하게 넘어가는지를 소리 없는 웅변으로 증명한다. 『쥐』가 전하는 메시지가 단순히 나찌의 유대인 대학살이라는 과거 사건이나 생존자들이 심각한 후유증을 겪는 개인사에 국한되지 않고, 인간이 인간을 차별하고 무시하고 상대의 존재를 말살시키려는 모든 경우―지금도 전세계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는―에 해당되는 보편성을 가질 수 있는 건 이 때문이다.
[책내용]
이 책의 내용
주인공 ‘블라덱 슈피겔만’은 2차 대전이 발발할 당시 독일 국경에 인접한 체코슬로바키아의 소도시 체스토초바에서 직물매매를 하던 미청년이었다. 그 즈음 블라덱은 폴란드의 백만장자 질버베르그의 딸과 결혼해 소스노비체츠에 있는 처가로 옮겨간다. 『쥐』는 블라덱과 아내 아냐 질버베르가가 소스노비에츠에서 아우슈비츠까지 영락해간 세월을 따라 진행된다.
이 책은 폴란드 부호 일가의 영락의 경로를 따라가면서 지옥의 문턱에 섰을 때 인간이 얼마나 비열하고 또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보고한다. 여느 홀로코스트 보고서에 견주어 『쥐』가 이룬 주요한 성과는 탁월한 사실성과 객관성에 기인한다. 『쥐』는 소스노비에츠에서 아우슈비츠까지의 행로에 절망과 죽음의 사례를 즐비하게 제시한다.
만행의 집행자는 비단 나치뿐만이 아니었다. 폴란드, 헝가리 등 동유럽의 여러 인종들이 앞 다투어 유태인 사냥의 주구 노릇을 했음은 물론, 유태인 스스로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 동포를 고발하고 살해했던 것이다. 심지어 돈벌이를 위해 인신매매를 자행한 사례도 드물지 않다.
아트 슈피겔만은 이 피의 역사를 그리는 동안 철저하게 객관적 자세를 견지한다. 작가는 만행이나 피해의 정도를 강조하기 위해 피의 현장을 가공하지 않고, 나치의 광기와 다른 인간 군상의 비열함을 들은 그대로 그리고 있다.
그는 『쥐』에 의도적인 메시지가 담길 것을 애써 경계한다. 그 결과 작가는 인간애에 대한 눈부신 성찰을 책 안에 배태시키는 가외의 성과를 얻는다. 인간이 인간성의 울타리를 벗어날 때,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 인간 이하로 전락하기 쉽다. 삶의 진실은 아비규환의 혼돈 속에서도 인간에 대한 사랑을 끝내 포기하지 않는 애틋한 마음에 있다는 것이다.
천신만고 끝에 블라덱 내외는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는다. 그렇지만 생존의 의의는 무엇이었는가. 블라덱은 생존의 정당성을 입론하기 위해 몸부림치지만 끝내 답을 얻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 블라덱이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것은 그의 재빠른 처세술 덕분이었다. 수용소 관리에게 영어를 가르치면서 일신의 안전을 꾀하기도 했고, 몸이 튼튼한 유태인과 재빨리 짝을 지어 남들 대신 살아남는 기지를 발휘하기도 한다. 몇 차례 선심을 베푼 경우도 언제나 그 보답을 계산에 넣고 행한 것이었다.
전쟁이 끝나자 블라덱 내외는 스웨덴에 임시 체류했다가 미국으로 건너간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평화의 시대에 발아한다. 이들 가족의 생활은 내내 악몽의 연속이었다. 급기야 아들 아트는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아내 아냐는 자살한다.
비극의 씨앗은 블라덱의 내부에 있었다. 미국에서 블라덱은 여전히 아우슈비츠 시절의 사고와 행동양식으로 살고자 했던 것이다. 그는 매일 길거리에서 철사며 나사못(한때 생존에 유용했던 것들)을 주워 모으고, 아무도 믿지 않고 왕래도 없이 자린고비로 살아간다. 또한 끊임없이 가족에게 (생존에 성공한) 자신의 생활방식을 강요하며 잔소리를 멈추지 않는다.
사실 동유럽 출신으로 대학살을 경험한 아버지와 자유분방한 미국 뉴욕의 히피였던 아들은 아버지가 과거 이야기를 하는 동안을 제외하고 지금 현재의 모든 문제들에서는 타협할 수 없는 끝없는 평행선에 서 있다. 그러나 아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아버지의 그 같은 현재 모습들은 다른 한편에서는 아우슈비츠의 경험이 만들어낸 모습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우슈비츠의 지옥에서 살아남았지만, 또한 “살아남지 못했다”는 이런 과거의 ‘현재화’는 아버지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아들인 저자에게도 ‘해결할 수 없는 숙제’로서 끊임없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 점에서 이 책은 인간의 역사적 경험이라는 과거가 자신과 그 후대에 어떻게 현재성으로 살아남게 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대전 동안 죽은 부모님 침실에 걸린 사진으로 존재하는 친형과 끊임없이 비교되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면서 성장하는 아들, ‘살아남는 기술’에 무능력하다는 아버지의 비난 때문에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던 아들, 무엇보다 아버지와 경쟁하지 않기 위해서 아버지가 간섭할 여지가 없는 예술을 택하는 아들, 그리고 나아가서는 ‘동종의 집단’임을 은연중 강조하는 유태인 친척들로부터 벗어나려는 아들. 작가인 아들의 이런 모습들은 아버지의 경우와는 전혀 반대되는 모습이긴 하지만 ‘부정의 모습’, ‘거부의 모습’으로서 과거가 만들어낸 또 다른 현재성이다.
아트 슈피겔만도 부모와 함께 아우슈비츠의 후유증에 시달린 것이었다. “나는 대학 기숙사에 들어갈 때까지, 세상의 모든 부모가 한밤중에 악몽으로 비명을 질러서 아이를 깨우는 줄만 알았다”는 저자의 증언은 마지막까지 여운을 남긴다.
내용상으로 볼 때 <쥐>가 그려내는 모습은 여기까지다. 결국 아버지도 아들도, 그리고 인류의 현재 또한 과거를 올바르게 청산하지 못한 상태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책을 덮으며, 단순히 과거사에 대한 이해에 그치지 않고, 현재의 우리 모습은 어떤 상태인지 돌이켜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