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에 등단한 시인이 등단 14년 만에 펴내는 첫 시집. 등단작 ‘풍경’을 비롯해 14년간 써온 58편의 시를 묶었다. 시인의 시는 오랜 세월동안 간직한 일기장에서 나옴 직한 미세하고 사소한 말들이다.
총 3부로 나뉜 시집의 전반부는 세계와 나, 타자와의 관계 혹은 거리가 등장한다. 시인은 짐짓 가볍고 담담한 이야기로 시인과 도시, 그리고 관계를 이야기 한다.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운명 앞에 어색하게 고개 숙이는 자의 목소리를 대변한다.
그들은 세상의 환멸과 우울한 미래를 흘낏 보아버린 아이어른, 절대적 진리와 종교의 불확실성 등으로 상처 입은 자, 노동과 여가를 오가는 성실한 인생의 주기를 회의하고 포기한 자 등이다. 이들을 통해 시인은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우울을 노래한다.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그 혐의를 묻는다.
첫문장
내 언어에는 세계가 빠져 있다
그것을 나는 어젯밤 깨달았다
내 방에는 조용한 책상이 장기 투숙하고 있다
신형철 (문학평론가) : 좋겠다, 죽어서……
수상 :2011년 노작문학상 최근작 :<전지적 곤충 시점> ,<서울리뷰오브북스 6호>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 … 총 55종 (모두보기) 소개 :199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풍경」이 당선되면서 등당한 시인이자 사회학자이다. 현재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 대학원의 문화매개전공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대표작으로 시집 『슬픔이 없는 십오 초』(2008), 예술비평서 『그을린 예술』(2013), 산문집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2019), 『책장을 번지다, 예술을 읽다』(공저, 2021)가 있다.
문학과지성사
최근작 :<[큰글자도서] 노랑무늬영원> ,<여름의 힌트와 거위들> ,<[큰글자도서]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등 총 1,937종
대표분야 :한국시 1위 (브랜드 지수 1,959,685점),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6위 (브랜드 지수 1,060,656점), 철학 일반 10위 (브랜드 지수 83,565점)
‘어둠의 몸’과 ‘달의 입’을 빌려 부르는 도시의 비가
-“찰나의 기억으로 가득 차 있는 그의 시집은 그가 그 자신으로서 존재하기 위해서 가까스로 긁어모아 내뱉은 그의 핏자국이다.” (허윤진 . 문학평론가)
199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풍경」이 당선되며 등단한 심보선이 데뷔 14년 만에 첫 시집 『슬픔이 없는 십오 초』(문학과지성사, 2008)를 펴냈다. 당시 심사를 맡았던 황동규, 김주연이 평한 바, “기성 시단의 어떤 흐름과도 무관하며, 시를 지망하는 사람들이 곧잘 사용하는 상투어들이나 빈말과는 전혀 다른 세계”를 그려온 심보선은 등단작 「풍경」을 비롯, 14년간 이 땅에서 혹은 바다 건너 도시에서 쓰고 발표해온 총 58편의 시를 이번 시집에 묶었다. 심보선의 시는, “현실을 면밀히 관찰하는 투시력, 그 현실 가운데를 스스로 지나가는 푹 젖은 체험, 그러면서도 거기에 이른바 시적 거리를 만들어 놓는 객관화의 힘, 번뜩이지 않으면서도 눅눅히 녹아 있는 달관의 표현력, 때로는 미소를 흐르게 하는 유머” 들이 서로 적당한 거리와 긴장감으로 조응하며 이제껏 쉽게 만날 수 없었던 시적 공간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근대 자본주의의 도래기에 한없는 도시의 우울과 그늘을 산책자로 관찰자로 부유했던 보들레르나 벤야민의 사유가 그러했듯이, 이제 더 이상의 극단을 예단하기도 두려운 후기 자본주의의 사회에서 심보선의 철학적 사유와 삶의 노래 또한 전범 없는 독창성을 띤다.
등단 후 열네 해 동안이나 시집의 침묵을 지켜온 데는, 물론 그의 한쪽 삶은 오롯이 대학에서 문화?예술사회학과 관련한 공부와 강의를 하는 데 할애된 탓도 있겠지만 그보다, 현기증 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의심과 고뇌를 ‘밥알’ 삼아 언어의 “불완전성 속을 배회하며 불안과 슬픔만을 완벽하게 중얼거”(「아이의 신화」)릴 수밖에 없었던, 그리하여 그에게 허락된 단어, ‘분열’과 ‘명멸’을 거듭하며 시를 쓸 수밖에 없었던 그만의 사정이 있었노라고 짐작해본다. 의자 위에서 “환상과 지식이 만나면 고통뿐”이라는, “심하게 훼손된 인생”(「천 년 묵은 형이상학자」)에 미혹된 이상 누구라도 옴짝달싹할 수 없었을 테니 말이다. “내향적이고 감정적인 기질로 속으로 고민을 하다 결론을 내리면 평소와는 다르게 단호”(「먼지 혹은 폐허」)해지는 시인은, 늘 “폐허의 가면”을 벗지 못한 채로 시간과 기억이 겹치고 훼절하며 만들어내는 “주름과 울림과 빛깔”에 골몰한다. 이 골몰과 상념의 시간이 오랜 꿈에서 막 깨어난 시인의 말/언어를 낳고 노래와 시로 거듭난다. 때문에 심보선의 시는 “생의 균형을 찾을 때까지 족히 수십 번은 흔들”(「대물림」)리고 나서야 얻은 울음 같은 것이다.
기억의 한편을 꾹 누르면 흐릿한 풍경 하나 폴라로이드 사진처럼 뽑혀 나오네. 나는 그것이 선명해질 때까지 온 육신을 흔들며 날뛰는 존재.// 운명을 믿고/구원을 저주하고/굴욕 직후에 욕망하고/ 태양을 노려보며 달빛을 염원하고/ 상상의 무반주 랩소디에 맞춰 덩실덩실 춤추다가/ 궁극적으로는, 그렇지, 완벽하게, 치명적으로, 넘어지는/ 거지. (「먼지 혹은 폐허」 부분)
총 3부로 나뉜 시집의 전반부에는 세계와 나, 타자와의 관계 혹은 거리에 대해 “볕 좋은 이른 봄”(「장 보러 가는 길」) 풍경을 읽듯 짐짓 가볍고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가령:
전날 벗어놓은 바지를 바라보듯/생에 대하여 미련이 없다/[…]/그때 생은 거짓말투성이였는데/우주를 스쳐 지나는 하나의 진리가/어둠의 몸과 달의 입을 빌려/서편 하늘을 뒤덮기도 하였다/그때 하늘 아래 벗은 바지 모양/누추하게 구겨진 생은/아주 잠깐 빛나는 폐허였다/장대하고 거룩했다
(「아주 잠깐 빛나는 폐허」 부분)
두 줄기의 햇빛/두 갈래의 시간/두 편의 꿈/두 번의 돌아봄/두 감정/두 단계/두 방향/두 가지 사건만이 있다/하나는 가능성/다른 하나는 무(無)
(「둘」 전문)
그러다가 중반부로 넘어오면 이내, 냉혹하고 복잡한 이 거리에서 나-시인은 “스스로를 견딜 수 없다는 것만큼/견딜 수 없는 일이 있겠는가/그리하여 나는 전락했고/이 순간에도 한없이 전락”(「전락」)한다. 이쯤에서 시의 모습은 보다 내면 고백적이고 격정적이며 시인의 꺾이는 무릎을 감추기 위한 흥얼거림도 군데군데 한몫한다.
나는 지금 참혹한 부끄러움을 느낀다
나는 지금 내 유언장이 몇 번 만에 펼쳐질 것인가를
생각한다, 생각한다는 것, 그것이 나의 지병이었다
그리고 같은 의자 위에 앉아 있는 나는
그들에게 너무 많은 것들을 고백해왔다 (「성장기」 부분)
나는 나에 대한 소문이다 죽음이 삶의 귀에 대고 속삭이는 불길한 낱말이다 나는 전전긍긍 살아간다 나의 태도는 칠흑같이 어둡다/[…]/그렇다면,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이 살아 있음을, 내 귀 언저리를 맴돌며, 웅웅거리며, 끊이지 않는 이 소문을, 도대체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어찌할 수 없는 소문」 부분)
결점 많은 생도 노래의 길 위에선 바람의 흥얼거림에 유순하게 귀 기울이네 그 어떤 심오한 빗질의 비결로 노래는 치욕의 내력을 처녀의 댕기머리 풀 듯 그리고 단아하게 펼쳐놓는가 노래가 아니었다면 인류는 생의 완벽을 꿈도 꾸지 못했으리 강물은 무수한 물결을 제 몸에 가기각색의 문신처럼 새겼다 지우며 바다로 흘러가네 생의 완벽 또한 노래의 선율이 꿈의 기슭에 우연히 남긴 빗살무늬 같은 것 사람은 거기 마음의 결을 잇대어 노래의 장구한 연혁을 구구절절 이어가야 하네 그와 같이 한 시절의 고원을 한 곡조의 생으로 넘어가야 하네 그리하면 노래는 이녁의 마지막 어귀에서 어허 어어어 어리넘자 어허어 (「노래가 아니었다면」 부분)
때로는 우울과 슬픔, 절망과 냉소에 붙들린 시인의 그것으로는 적이 낯선, ‘장르화된 삶의 고통’을 꼬집는 짓궂은 유머가 정색의 고백과 명명보다 더 크게 우리의 마음을 휘젓는다. 그와 더불어 “씨익, 웃을 운명을 타고난”(「편지」) “유일무이한 시인이요 심장이 큰 소리로 뛰는 가수”(「너」)인 그와 함께 흥얼거리고 엉거주춤 춤춰도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을 추동한다.
시간이 매일 그의 얼굴을/조금씩 구겨놓고 지나간다/이렇게 매일 구겨지다보면/언젠가는 죽음의 밑을 잘 닦을 수 있게 되겠지 (「한때 황금 전봇대의 生을 질투하였다」 부분)
안녕하세여, 어디 가세여, 나 몰라라 도망가지 말아여, […] 도대체 누구냐고여, 몇 생 전이던가여, 우리 어느 심하게 게으른 나라의 국가대표 산책팀 소속이었자나여, 기억 안 나세여, 왜 저보고 사는 게, 납치할 아이 하나 없는 세상의 유괴범처럼 황당하게 외롭다고 그랬자나여, 불어였던가, 스페인어였던가여, 왜, R 발음에 세상의 모든 부조리를 우겨 넣은 듯한 언어로 말했자나여, 그렇지여, 첫번째 생 다음은 다 후렴구이지여, 그렇지여, 신은 회로애락을 무한의 버전으로 믹싱하는 DJ지여, 그렇지여, 우리 인간은 그 리듬에 맞춰 춤이나 출 따름이지여, (「여, 자로 끝나는 시」 부분)
심보선의 첫 시집 『슬픔이 없는 십오 초』는 이렇게 우리 앞에 멈춰 있다. “오랜 세월 간직한 일기장”에서 나옴 직한 “무수하고 미세하고 사소한 말들”(「떠다니는 말」)이, 또 가장 구체적이고 내밀한 개인의 경험 ― 삶과 죽음, 개인과 사회, 사랑과 이별, 찰나의 환희와 영원의 불안, 유한성과 무한성, 거짓과 진실 ― 들이 나와 너, 우리를 둘러싼 사회적 멍울로 점증화하는 과정 속에서 태어난 심보선의 ‘시(쓰기)-말(하기)-노래(하기)’가 우리 앞에 와 있다.
“치욕에 관한 한 멸망한 지 오래인 세상”(「슬픔이 없는 십오 초」), “이미 사라진 것들 뒤에 ”(「오늘 나는」) 숨은 시인은 “누추하게 구겨진 생”(「아주 잠깐 빛나는 폐허」)을 앞에 두고 꺾인 허리로 슬픔을 곱씹고 몸에 새긴다. 그에게 각인된 슬픔의 무늬는 부지불식간에 우리의 그림자로 목덜미에 딱 붙어 그만 떨어지지 않는다. 심보선의 첫 시집 『슬픔이 없는 십오 초』에 담긴 총 쉰여덟 개의 독한 바이러스가 이렇게 우리 몸에 감염된다. 그 감염의 속도는 “봄날이 등 뒤에서 산불처럼 크게 웃으며”(「18세기 이후 자연과 나의 관계」) 덮치듯 가히 전복적이다.
“완벽한 전락” 이후의 더 “완벽한 부활”을 꿈꾸는 “고독한 아크로바트”
-“그에게 종교란 궁극적으로 타인을 향한 동경, 곧 사랑이고, 사랑은 반복된다. […] 심보선의 시집은 그 자체로 슬픔을 저축해가는 과정이다. 언어의 광장에서 일어나는 사회적 행위이다.” (허윤진 . 문학평론가)
아버지를 잃은 소년, 아내와 연인에게서 멀어진 남자, 세상의 환멸과 우울한 미래를 흘낏 보아버린 ‘아이어른,’ 절대적 진리와 종교의 불확실성, 진실보다 더 진실다운 거짓, 뒤집힌 추억 속 새카만 추문으로 상처 입은 자, ‘노동과 여가를 오가는 성실한 인생의 주기’를 회의하고 포기한 자, 폭력과 자본을 숭배하는 사회의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한 낙오자, 해서 어쩔 수 없이 운명 앞에 ‘어색하게’ 고개 숙이는 자의 목소리가 이 시집을 지배한다.
피붙이의 그리움에 대해, 빗나간 화살과 함께 떠나버린 사랑에 대해, 미망처럼 맴도는 이별에 대해, 그리고 불확실한 운명과 이상에 대해 노래하는 그-시인은 현재 “어두운 침묵의 시간”과 “난해한 미래의 독법을 궁리하는 시간”(「빵, 외투, 심장」) 속에 있다. 이것은 비단 시인만의 처지가 아니다. 꿈꾸듯 고백하는 시인의 목소리가 결코 감상과 푸념에 매몰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은 어떤 종류의 가구로 진화할 것인가?” “밤새 고심”(「슬픔의 진화」)한다. 이것은 개인의 일기가 아니라 시대의 우울이자 도시문화의 병리적 현상으로 우리 모두에게 그 혐의를 묻는다. 시를 쓰는 동안 시인의 책상 위에 놓인 벗들은 지식과 이념, 신화와 종교라고 이름 불리는 것들이고, 그는 기꺼이 이 시간을 “아무도 없는 고요한 평일의 성전”이라 부르며 그 속에서 "치유되고 고양”된다. 그리고 “유일무이해지는 동시에 비밀”(뒤표지 시인 산문)을 저축해간다. 시를 쓰게 된 동기, 계속해서 시를 써야 하는 이유, 그리고 우리가 시를 읽는 이유, 이 모두에 대한 명쾌한 결론이다.
세기말을 지나 휘황한 봄날이다/귀를 틀어막은 청소부가 실패한 비유들을 쓸어 담고 있는데/꽃가루들은 사방에서 속수무책으로 흩날린다/눈물을 획책하고 있는 저 미세한 말씀들, 지금은/알레르기가 종교를 능가하는 시대라서/파멸과 구원이 참으로 용이해졌다/[…]/꽃가루처럼 산산이 부서져 흩날리는 생의 신비여/십자가 위에서 으아, 기지개 펴는 낙담한 신성이여/이제 내 몸엔 구석구석마다 가지각색의 영혼들이 깃들어 있다/다들 사소해서 다들 무고하다 (「종교에 관하여」 부분)
그대는 말한다, 당신은 첫 페이지부터 파본인 가여운 책 한 권 같군요, 나는 수치심에 젖어 눈을 감는다, 그리고 묻는다, 여기 모든 것에 대한 거짓말과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한 진실이 있다, 둘 중 어느 것이 덜 슬프겠는가, 어느 것이 먼 훗날 불멸의 침대 위에 놓이겠는가, 확률은 반반이다, 확률이란 비극의 신분을 감춘 숫자들로 이루어진 어두운 계산법이 아닌가 (「확률적인, 너무나 확률적인」 부분)
“인간과 언어 이외에 의미 있는 처소”를 찾아 헤매지만 “지금 주어진 것들만이 전부”(「웃는다, 웃어야 하기에」)라고 다짐하는 그/시인은 애써 자신의 “발자국을 짓밟으며 미래로” 나아간다. 쉼 없이 좌절하지만 이내 씨익 웃고 어색한 입술의 달싹임으로 쓸쓸함을 감추는 지독한 허무주의자의 노래로 가득한 시집 『슬픔이 없는 십오 초』는, 현재의 절망을 잠시 접어두고 일단 “음험한 꽃들이 지천으로”(「그것의 바깥」) 피어날 ‘구멍’ 뚫린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갈 수밖에 없는 우리 모두의 처지를 일깨운다.
간혹 나는 밤거리로 뚜벅뚜벅 걸어 나가 진열장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본다/나 자신이 아득한 심연으로 되비치고/등 뒤의 어둠과 눈앞의 환함이 서로를 환대할 때까지/나는 일생에 걸쳐 가장 가난한 표정으로 거기 오래 서 있는다/그러고는 오묘한 정취에 젖어 달이 뜬 쪽을 향해 물구나무로 걸어가는 것이다 (「구름과 안개의 곡예사」 부분)
불어라 바람아, 너는 시대를 초월한 베이비 붐, 먼지의 절망으로부터, 태풍의 혁명까지, 가릴 것 없이 낳는, 너의 오만한 다산성 육체, 그 앞에서 숨 막히는 내 정신의 급체, 비등점까지 처참히 달아오르는 열등감, 사람은 바람의 지경을 꿈꾸고, 바람은 사람의 치욕을 가꾼다, 오거라 바람아, 아주 먼 데서 머리에 검은 띠를 묶고, 장거리주자처럼 달려오거라, 너 없이도 휘날리는 머리칼로, 너 없이도 펄럭이는 깃발로, 너를 맞이하는 날, 생의 오랜 냉가슴은 뜨거운 평안을 안으리, 놀라워라, 광풍이 불어도 한 치의 오류 없이, 제 그림자를 정확히 찾아 앉는 낙엽, 낙엽, 낙엽, 저 야윈 나무들의 하찮은 기적, 기적, 기적, 불어라 바람아, 바람이 불어도, 사람은, 바람 속에서, 불멸을 숭배하는 하루살이의 날갯짓처럼, 사는 것이다, 살아야 하는 것이다,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불어라 바람아」 전문)
“사랑은 여전히 오는가, 여전히 아픈가, 여전히 신열에 몸 들뜨나”
-“사랑은 기본적으로 사회적일 수밖에 없다. 사랑은 모든 조건에서 독립된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개인 간의 소통이 이루어지는 순간 그들은 신뢰의 계약에 기초한 공적 영역으로 발을 들여놓게 된다. 여기에서 나만의 의지와 나만의 욕망이 성립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 관계 속에서 우리는 나와 타인의 의사를 현명하게 조율하는 방법을 배운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날것의 나를, 나의 수많은 모순을 냉정하게 인정하면서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성인이 된다. 감정의 관례(冠禮)를 치른다. 종교란 궁극적으로 타인을 향한 동경, 곧 사랑이고, 사랑은 반복된다.[…] 그에게 있어 사랑은 학문적으로는 사회학이요, 예술적으로는 시(詩)요, 일상적으로는 신앙이기에.” (허윤진 ? 문학평론가)
밤거리마저 눈 시리게 빛나는 꽃들로 불 밝혀진 봄날이다. 시대의 우울과 암담한 미래는 잠시 내려놓고, 순간의 환희에 몸 맡긴다 한들 한 올 죄책감 느끼지 않아도 되는 그런 계절이 왔다. 시집 『슬픔이 없는 십오 초』는 사소한 인간의 사랑과 지독한 이별 후의 시간에 대한 노래들로 가득하다. 마른 바람이 휑한 시멘트 골목을 돌아나갈 때, 우리는 좀더 자주 이 구절구절들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내가 원한 것은 단 하나의 완벽한 사랑이었네. 완벽한 인간과 완벽한 경구 따위는 식후의 농담 한마디면 쉽사리 완성되었네. 나와 같은 범부에게도 사랑의 계시가 어느 날 임하여 시(詩)를 살게 하고 폐허를 꿈꾸게 하네. (「먼지 혹은 폐허」 부분)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먹다 만 흰죽이 밥이 되고 밥은 도로 쌀이 되어
하루하루가 풍년인데
일 년 내내 허기 가시지 않는
이상한 나라에 이상한 기근 같은 것이다 (「식후에 이별하다」 부분)
가장 뚜렷한 손금인 줄 알았는데
깊이 파인 흉터이듯이
무엇을 쥐었다 베었던가
생각은 안 나지만
손이 아주 아팠던 기억은 있듯이
그렇게 남자는 여자와의 사랑을 되돌아볼 것이다
숭고한 영감이라 부르든
가혹한 저주라 부르든
사랑을 무어라 부르든
상관이 없었다
그 정도였다
이별하고 나자 남자의 손은 점점 평범해져갔다
환속한 중의 이마가 빛을 잃어가듯이 (「평범해지는 손」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