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전선집. 농암 김창협은 명문 안동 김씨 가문의 자제이자 노론의 영수 송시열의 제자로서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당대의 주류에 속한 장래가 촉망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당쟁으로 인해 아버지 김수항과 스승 송시열이 형벌을 받아 죽게 되자 수십 차례 계속된 관직 제수에 단 한 번도 응하지 않고 철저히 처사(處士)의 삶을 살아갔다.
결국 김창협의 삶을 채운 것은 대부분 학문과 문학, 그리고 산수 유람이다. 특별한 이력이나 눈에 띄는 공적이 없으니 그의 삶이 우리의 주목을 끌지 못한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김창협은 오늘날 우리의 인지도와는 달리, 조선 후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조선 최고의 학자나 문인을 꼽을 때 몇 손가락 안에 들던 인물이다.
김창협의 문집 <농암집>은 그의 사상사.문학사적 성취를 잘 보여 줄 뿐 아니라, 그가 한 인간으로서 겪어야 했던 삶의 굴곡과 역정, 나아가 당시 조선 사회의 정치상.사회상까지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최근작 :<팔대가문십선> ,<조선후기 한문비평 1> ,<한국 산문선 5> … 총 11종 (모두보기) 소개 :조선 숙종조의 정치가이자 학자로서 경학(經學)과 성리학(性理學)은 물론이요, 문학, 서화에도 뛰어난 실력이 있어 비록 행공(行公)은 하지 않았지만 대제학에 뽑힌 인물이다.
자는 중화(仲和), 호는 농암(農巖)·삼주(三洲)·동음거사(洞陰居士)·한벽주인(寒碧主人), 시호는 문간(文簡)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부친은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며, 형 김창집, 동생 김창흡·김창업·김창집·김창립 모두가 서화에 능했던 것으로 전한다.
최근작 :<나만이 알아주는 나> ,<훈민정음 해례본> ,<고전의 시선> … 총 11종 (모두보기) 소개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한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한문학 전공으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연구 분야는 한문학 비평 및 한문산문이며, 현재 고려대학교 한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 『조선후기 한문산문의 이론과 비평』 『농암집: 조선의 학술과 문화를 평하다』 『고전의 시선: 우리 산문 다시 읽고 새로 쓰다』를 펴냈고, 『나를 찾아가는 길: 혜환 이용휴 산문선』 외에 다수의 공저와 공역서 및 연구논문이 있다.
최근작 :<고전적정리입문> ,<생각, 세 번> … 총 10종 (모두보기) 소개 :서울대학교 교육학과 졸업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문학박사
민족문화추진회 국역연수원(연수부, 상임연구부) 졸업
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위원(現)
논문 및 역서
<退溪 李滉의 朱子書節要 編纂과 그 刊行에 관한 硏究>, <圃隱集의 編纂과 刊行에 관한 硏究>, <한국에서의 朱子文集 수용방식> 등
≪拙藁千百≫, ≪記言≫(공역), ≪明齋遺稿≫(공역), ≪弘齋全書≫(공역), ≪星湖全集≫(공역) 등
“나는 조선의 문학을 말할 때에 농암(農巖)과 연암(燕巖)을 제일류로 추대하고자 한다.”
1936년에 현상윤 선생이 『삼천리(三千里)』라는 잡지에 게재한 글의 일부이다. 연암이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실학자이자 대문호인 박지원(朴趾源)의 호라는 사실은 대개 알고 있지만, 그와 동등하게 거론된 농암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가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농암 김창협은 명문 안동 김씨 가문의 자제이자 노론의 영수 송시열의 제자로서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당대의 주류에 속한 장래가 촉망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당쟁으로 인해 아버지 김수항과 스승 송시열이 형벌을 받아 죽게 되자 수십 차례 계속된 관직 제수에 단 한 번도 응하지 않고 철저히 처사(處士)의 삶을 살아갔다.
결국 김창협의 삶을 채운 것은 대부분 학문과 문학, 그리고 산수 유람이다. 특별한 이력이나 눈에 띄는 공적이 없으니 그의 삶이 우리의 주목을 끌지 못한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김창협은 오늘날 우리의 인지도와는 달리, 조선 후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조선 최고의 학자나 문인을 꼽을 때 몇 손가락 안에 들던 인물이다.
조선 후기 주자학의 가장 높은 봉우리
조선에서 이루어진 주희 저술에 대한 주석서는 120여 종에 이르는데, 이는 중국에서도 찾을 수 없는 성과다. 경서 본연의 의미를 살리기 위해 끊임없이 시도된 주석과 해석들은 각 시대의 문제들을 반영하여 더디지만 새로운 진전을 이룩해 갔다. ‘주자로 학문하기’ 역시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스스로 평가절하할 일은 아니다. 김창협은 19세기까지도 조선에서 거의 절대적인 주류를 이루었던 주자학에서 최고봉에 오른 대학자이다. 김창협은 매우 정교한 사유와 치밀한 논리, 그리고 섬세한 언어 구사를 통해서 주자학을 한 단계 더 심화시켰다고 평가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로 오면서 주자학이 사각 지대에 놓여 있다 보니, 그 안에서 최고봉에 올라 있던 김창협의 학문도 주목을 받지 못했다. 송시열의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에 대한 질문과 김창협 자신의 견해를 담은 『주자대전차의문목(朱子大全箚疑問目)』은 조선 주자학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 주는 명저이다. 이제 주자학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김창협의 학문 세계를 주목해 볼 때다.
문학사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다
김창협은 당대뿐만 아니라 후대의 많은 비평가들이 숙종대 최고 문장가로 꼽을 정도로 문장가로서의 명성이 매우 높았다. 조선 후기 대부분의 문장 선집에 김창협의 문장이 수록되었는데, 담박하고 정갈한 한시 작품들도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았지만, 문장가로서의 명성은 주로 한문 산문을 통해 얻은 것이었다. 김창협은 사상적으로 썩 이채로운 작품을 쓴 일도 없고, 정통의 문체를 벗어난 파격을 추구하지도 않았다. 학문적으로 주자학을 고수하고 심화한 것처럼, 문장에서는 한문 산문의 정통이라 할 수 있는 당송고문(唐宋古文)을 추구했다. 김창협의 산문은 장르의 규칙과 모범적 전형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탁월한 수준에 올랐다고 평가된다.
김창협은 박학한 문예지식을 바탕으로 분석적이고 전문적인 비평 작업을 행한 탁월한 비평가이기도 하다. 김창협의 예리한 비판력과 섬세한 감식안은 이전의 논의와 다른 새로운 문학사적 흐름을 형성하는 데 일조하였다. 당대의 지식과 문화 수용을 선도하고 정계 주류에서 시대의 흐름을 목도할 수 있었던 김창협은 학문적 엄정성과 문학적 감수성을 바탕으로 조선조 최고 수준의 비평을 제출하였다. 비단 조선뿐만 아니라 18세기 초입 동아시아의 지적 수준이 갈 수 있는 한 정점을 우리는 김창협의 비평에서 볼 수 있다.
지금의 우리가 김창협의 삶과 글을 지금 다시 떠올려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그 답을 찾아가는 여정은 조선 후기의 사상사와 문학사를 보는 우리의 시각을 돌아보는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김창협의 문집『농암집』은 그의 사상사·문학사적 성취를 잘 보여 줄 뿐 아니라, 그가 한 인간으로서 겪어야 했던 삶의 굴곡과 역정, 나아가 당시 조선 사회의 정치상·사회상까지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오랫동안 주목하지 못하고 있던 대학자·대문호의 삶과 성취, 그리고 그가 살았던 시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의 구성
이 선집은 7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김창협에 대한 후대의 평가를 모은 마지막 장을 제외한 나머지 여섯 개 장은 김창협의 삶의 궤적을 따라 시기별로 구분한 것이다. 시기별로 주요 작품을 정선(精選)하여 번역하고, 각 작품 뒤에 작품을 짓게 된 배경 등을 설명한 평설을 실어 작품 이해를 도왔다.
1장 ‘학문의 길 위에 서다’에서는 24세까지 지은 작품들을 통해 젊은 시절 김창협의 지향과 고뇌를 엿볼 수 있다.
2장 ‘은거를 마음먹다’에는 25세부터 30세까지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이 기간은 당쟁으로 인해 유배길을 떠난 아버지 김수항을 따라 유배지인 전라도 영암과 강원도 철원을 수시로 오가던 시기이다. 이 시기의 작품을 통해 선비의 출처(出處)에 대한 고민과 결단을 엿볼 수 있다.
3장 ‘의리로 세상을 논하다’에는 31세부터 38세까지의 작품을 담았다. 이 시기에 김창협은 문과에 장원 급제하고 성균관 전적, 홍문관 교리, 함경북도 병마평사, 성균관 대사성, 승정원 우승지 등의 벼슬을 역임하며 관료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때 지은 작품을 통해 당시 국정에 대한 김창협의 강한 비판 의식을 살필 수 있으며, 특히 왕에게 올린 글을 통해 당쟁으로 혼란스러웠던 조정에서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직간하는 그의 강직한 면모를 읽을 수 있다.
4장 ‘아버지와 스승의 죽음을 겪다’에는 39세부터 45세까지의 작품을 모았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인해 아버지 김수항과 스승 송시열이 형벌을 받아 세상을 떠난다. 이에 벼슬할 뜻을 접고 은거를 시작한 김창협의 사유와 행적이 이 시기의 작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5장 ‘학문을 논하고 문학을 평하다’에는 46세부터 48세까지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완숙기에 접어든 김창협의 학문과 문학 세계를 엿볼 수 있으며, 그중에서「지(智)와 지각(知覺)은 어떻게 다른가」는 이후 벌어지는 호락논쟁(湖洛論爭)의 주요 논제를 제기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6장 ‘시련 속에서 학문을 꽃피우다’에는 김창협 만년의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김창협의 만년은 가족의 죽음으로 점철된 시기였다. 50세 때 셋째 딸 오씨 부인이 죽은 것을 시작으로, 5년 사이에 외아들 김숭겸, 백부 김수증, 둘째 딸 이씨 부인, 어머니 나씨 부인까지 잇달아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이 시기에 지은 작품에는 깊은 슬픔이 배어 있다. 그러나 그는 슬픔에 매몰되어 있지만은 않았다. 김창협의 만년은 자신이 평생 파고든 학문적 성과가 완성된 시기이기도 했다. 특히 51세에 완성한「퇴계와 율곡을 넘어서 사단과 칠정을 논하다」는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의 학설을 절충하여 이기(理氣) 논변을 새로운 국면으로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작품이다.
7장 ‘학문과 문장으로 일가를 이루다’에는 조선왕조실록과 각종 문집, 필기잡록에 수록된 김창협의 학문과 문장에 대한 평가를 모았다.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와 같은 학문과 한문산문의 모범으로 추앙되는 구양수와 같은 문장을 겸비했다는 평은 김창협이 조선 후기 사상사·문학사에서 갖는 위상을 잘 보여 준다.
이 책의 서두에는 김창협의 삶을 요약하여 서술한 해제를 실었고, 말미에는 연보를 첨부하여 김창협의 삶을 좀 더 상세하게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