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가하자, 끙끙>의 매력은 무엇보다 그림에 있다. 강렬한 색채와 힘이 느껴지는 대담한 표현은 배변 행위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한다. 아이들에게 배변은 창조 행위이다. 똥을 눌 때 아이는 자기 내면을 쥐어짜서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어머니가 아이를 낳듯, 무언가를 만들어 내기 위해 격렬한 노동과 행위를 하듯 아이도 용을 쓴다. 그렇게 만들어 낸 뿌듯한 창조물이 똥이다. 더럽다는 의미는 어른들이 덧씌운 것일 뿐 아이에게 똥은 자랑스러운 자신의 분신이다. 최민오의 그림만큼 배변을 강렬한 창조 행위로 그린 작품은 발견하기 어렵다.
이처럼 아이들 마음속에는 불안이 도사리고 있고, 자기를 욕하고 손가락질 하는 생각이 숨어 있다.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있다 작은 실패를 경험하거나, 옆에서 자신을 지켜 주는 사람이 없을 때 스멀스멀 올라온다. 그래서 강아지똥을 소중히 생각하는 민들레꽃이 필요하다. 부모가 필요하고 친구가 필요하다. 사실 누구나 내면에 강아지 똥은 물론 민들레꽃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아이들은 아직 모른다. 그러기에 손을 잡아 주는 따뜻한 손길이 필요하다. 이 그림책이 아이들에게 바로 그런 손길이다.
우리에게 <곰 세 마리>라는 노래가 있다면 서양에는 <금발머리와 곰 세 마리>라는 유명한 민담이 있다. 금발머리 소녀가 곰 세 마리가 사는 집에 들어가서 작은 모험을 벌이다 들켜서 도망친다는 단순한 이야기다. 내용의 단순함에도 불구하고 이 민담은 수십 명의 그림책 작가를 사로잡았고 여러 편의 걸작을 낳았다. 특히 두 권이 주목할 만하다. 미국적이면서 유쾌한 그림을 그리는 바바라 맥클린톡의 <금발머리와 곰 세 마리>가 고전적인 느낌을 주는 반면 앤서니 브라운의 <나와 너>는 이 민담을 살짝 비틀어 현대 도시의 가족 문제를 다루고 있다.
치치는 어른들이 한눈파는 사이에 탈출을 시작한다. 어른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는 자기 마음대로 살아 보고 싶은 아이들의 욕구를 보여 준다. 탈출한 치치가 신나게 모험을 한 뒤 돌아왔을 때 기꺼이 환영하고 기뻐하는 어른들의 모습은 아이들이 보고 싶어 하는 어른의 모습이다. 아이들의 모험을 장려하고, 무사히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원형적인 서사를 띤다는 점에서 초기 그림책의 전형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다.
<숲 속에서>의 아이는 종이 모자를 쓰고 나팔을 불면서숲으로 들어간다. 이곳에서 사자는 머리를 빗고, 코끼리는 털옷과 신발을 신고, 곰은 맛난 잼과 땅콩을 들고 아이를 따라간다.아이는 브레멘의 음악대처럼 동물들을 이끌고 숲을 산책하고 둥글게 앉아 놀이를 한다. 아이는 자신이 두려워하던 것을 놀이와 꿈에서는 이겨 낸다. 아이들이 하는 놀이를 지켜보면 같은 놀이를 반복하면서 자신이 마주치는 두려운 감정을 이겨 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꿈도 마찬가지다. 때로는 두려움에 패배해 악몽을 꾸기도 하지만 아이는 또 다시 꿈을 꾸며 두려움을 이겨 낸다. 숲도, 꿈도, 놀이도 아이가 자라는 방법이다.
꿈이 손에 잡힐 듯 다가오는 순간이 있다. 엄마라면 그 꿈이 이뤄지도록 도와줄지 모른다. 구름은 부드러워 안기고 싶지만, 단단해 보이지 않아 의지하기엔 부족하다. 역시 엄마가 나서야 한다. 엄마는 솜사탕같은 구름을 단단한 구름빵으로 만들어 준다. 아이들의 막연한 꿈을 현실로 만들어 주는 것이다. 현실에선 늘 한계를 느끼고 마는 아이들이기에 꿈과 환상은 현실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이다. 부모는 꿈을 도와주는 사람이어야 하지만 현실에서 부모는 꿈을 깨라고 채근하는 경우가 많다. 이 그림책에서 구름빵만 아이들의 소망은 아니다. 엄마 역시 아이들이 소망하는 엄마이다. 꿈 깨라고 말하지 않고 꿈꿀 수 있게도와주는 엄마이다.
바다는 감정을 상징한다. 알 수 없지만 한 번 움직이면 엄청난 힘을 가진 감정. 또한 바다는 갈등을 품고 있는 무의식의 상징이다. 빠져들면 헤어 나오지 못할까 두렵지만 더 큰 존재가 되기 위해선 피할 수 없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물에 들어가 세례를 받듯 어른이 되기 위해선 감정의 소용돌이를 지나가야 한다. 감정과 세상은 아이를 흔들지만 아이는 거기서 배우고 또 나아간다. 아이를 지켜보며 아이의 모습에서 배우는 이수지의 그림책은 겸손하기에 따뜻하다. 그 따뜻함이 감동이다.
박정선이 글을 쓰고 이수지가 그림을 그린 <그림자는 내 친구>는 그림자의 원리를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종이를 오려서 모양을 만들고 실제로 빛을 비춰 그림자를 만든 아이디어는 무릎을 치게 한다. 그림책을 읽어 주고 아이와 함께 종이를 오려 그림자놀이를 한다면 아이도 금방 그림자 박사가 된다.
우산과 안경, 장화와 털모자는 아이들에게 익숙한 일상적인 사물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림자일 뿐, 사실은 박쥐와 뱀, 불도그와 뱀이 귀여운 얼굴을 하며 튀어나온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아이들이 배워 갈 무렵 이 그림책은 아이들의 상상력에 불을 붙인다. 30개월이 지나면 아이들은 눈에 보이는 것 너머의 세상을 보기 시작한다. 자기 눈에 보이면 있는 것이고, 안 보이면 없는 것인 줄 알던 순진한 아이가 더 이상 아니다. 부모도 하나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심지어는 부모를 속일 수도 있다. 그림자는 하나의 사물이 여러 모습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아이들을 매혹한다.
할아버지에게 기대어 걷던 아이는 이제 할아버지가 걷는 것을 도와준다. 아이와 할아버지의 관계는 여느 어른과의 관계와 다르다. 아이는 할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짧은 기간 동안 서로 다른 두 가지 역할을 경험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처음에는 사랑을 받지만 나중에는 자신이 할아버지에게 사랑과 보살핌을 주게 된다. 이 과정에서 아이는 어른이 되어 간다.
현실에선 한 뼘 자라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눈은 뭉치고 굴리면 쉽게 커진다. 눈사람은 더 커지고 싶고, 더 자라고 싶은 아이의 소망을 반영한다. 아울러 나도 뭔가 그럴 듯하고 큰 걸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뻐기고 싶은 아이의 바람을 보여 준다. 엄마, 아빠가 날 만들어 냈다면 나도 이렇게 큰 걸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아이는 말하고 싶다. 엄마, 아빠처럼 나도 능력이 있으니 무시하지 말라는 아이의 불안과 자존심의 표현이 눈사람이다.
달빛 비치는 눈 덮인 산과 거리 풍경이 매력적인 그림책 <아기여우와 털장갑>을 보자. 구로이 켄의 그림은 보기만 해도 가슴이 따뜻해 온다. 엄마 여우는사람들에게 잔뜩 겁을 먹고 있다. 그래서 아기 여우에게 사람들을 조심하라며 겁을 잔뜩 준다. 물론 아기 여우를 생각하는 마음 때문이다. 하지만 겁을 준 탓에 긴장한 아기 여우는 오히려 실수를 한다. 하지만 아기 여우는 작은 실수에도 연연해하지 않고 담대하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사람들을 관찰했다. 아기 여우가 본사람들의 모습은 엄마 여우가 걱정하며 말한 것과는 차이가 컸다.
돌에서 두 돌까지의 시간 동안 아이들은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는 것에 대해 관심이 많다. 처음에는 물체가 눈앞에서 사라지면 그냥 없다고 생각한다. 그네를 태울 때 앞으로 나아가면서 건너편의 엄마가 보이면 아이는 웃고, 뒤로 가면서 엄마가 안 보이면 얼굴을 찡그릴 정도다. 없어진 것이 아니라 잠시 안 보이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출생 후 2년이란 시간이 필요하다. 그때서야 보이지 않아도 없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물의 영속성에 대한 개념이 생긴다. 영속성은 아이의 발달에 무척 중요한데 엄마가 안 보여도 어딘가 있다고 생각해야 비로소 엄마가 안 보이는 새로운 세계도 겁 없이 탐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다 히로시의 <사과가 쿵!>을 처음 본 부모들은 이 그림책이 왜 아이들에게 인기가 있을까 궁금해한다. 그림은 엉성해 보이고 내용은 단순하다. 하늘에서 큰 사과가 쿵 떨어진다. 그 사과를 개미와 나비, 벌과 애벌레 등 곤충이 먼저 먹고, 토끼와 너구리, 여우와 돼지가 먹고, 마침내 사자와 곰, 코끼리와 기린처럼 큰 동물도 나눠 먹는다. 그런데도 사과는 남아 있다. 비가 오자 가운데만 파먹은 사과의 윗부분을 우산 삼아 모두가 비를 피한다.
마지막 장면, 엄마 오리가 아이를 찾은 순간 역시 매력적이다. 엄마는 아이를 찾느라 고생한 것, 마음 졸인 것에 대해 아이를 야단치지 않는다. 심지어 다음에는 이야기하고 가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그저 아무 말 없이 앞장서 연못을 헤엄쳐 간다. 늘 부모의 잔소리에 지친 아이들은 이 모습에 푹 빠져든다. 갈 곳이 뻔한 연못이 아닌 도시에서 살아가는 현실에서 이런 부모가 되기란 어렵고, 꼭 바람직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내가 지나치게 불안해서 아이의 모험을 가로막는 것은 아닌지, 그것이 아이를 더 작고 무능하며 내게 의존하도록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부모라면 묻고 또 물어야 한다. 균형은 아이에게도 부모에게도 어려운 말이지만, 부모는 아이가 아니기에 균형을 잡으려 애써야 한다.
애착과 사랑
이 그림책은 종종 마법을 일으킨다. 그림책을 읽으면 부모와 아이는 어느덧 서로 마주 본다. 그리고 서로를 부르며 부둥켜안게 된다. 체온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고, 사랑의 눈빛을 나눈다. 그 시간이 좋아 부모도, 아이도 이 그림책을 읽고 싶어 한다. 하루 저녁에 대여섯 번을 읽고 그 두 배 정도는 서로를 끌어안은 다음에야 잠자리에 들었다는 증언을 여러 부모에게서 들었다. 그만큼 아이에게는 사랑이 필요하다. 부모가 필요하다. 자기를 안아 주는 사람, 소중히 여겨 주는 사람, 그 품에서 안심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사실은 부모도 마찬가지다. 자기를 안아 줄 사람이 가끔은 절실하다. 그래서 아이를 안으며 스스로의 마음을 위안한다. 사랑을 주면서 사랑을 받는다. 인생의 빛나는 시간 중 한때가 바로 그 순간이다.
하지만 티라노사우루스와 안킬로사우루스가 영원히 같이 살 수는 없는 일이다. 안킬로사우루스가 멀리 산에까지 가서 빨간 열매를 따 와 선물한 순간, 티라노사우루스는 그걸 알아챈다. 뭉클한 사랑을 느끼는 바로 그 순간, 사랑이 끝날 시점임을 깨닫는다. 빨간 열매를 먹는 공룡과 빨간 열매를 먹는 공룡을 먹는 공룡이 영원히 같이 살 순 없는 일이니까. 티라노사우루스는 아이가 제 갈 길을 갈 수 있도록 훈련시킨다. 그리고 마침내 세상으로 내보낸다.
부모가 거울처럼 아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할 때 아이의 내면은 팽창한다. 자기가 가진 힘보다 더 많이 스스로를 믿는다. 허황되어 보일지 몰라도 그렇게 믿지 않는다면 아이는 도전을 시작하기 어렵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아이는 자기 주변을 이상화한다. 주로 부모가 이상화의 대상이다. 부모처럼 대단한 존재가 자신을 사랑하니 자기도 괜찮은 사람이라 믿으려 한다. 아이들에게 부모란, 부모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더 힘 센 존재이다. 아이는 자기를 위해서 그렇게 믿는다, 세상으로 나아갈 힘을 얻고 부족한 자신에 대한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부모를 따라 배우며 자신을 키운다.
인형을 소중히 다루는 아이 마음의 뿌리는 어디에 있을까? 그 마음의 뿌리는 불안에 있다. 아이들은 늘 두렵다. '내가 다른 애와 바뀐다면 우리 부모는 어떻게 할까? 나는 부모에게 과연 소중한 존재일까?' 아이는 이러한 두려움을 이기려 인형에게 매달린다. 내게 인형이 이렇게 소중하다면 부모에겐 자그마한 자신도 소중할 것이다. 아이는 인형을 아끼면서 부모에게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저는 작고 보잘 것 없는 존재지만 소중해요. 제가 당신 곁에 있다는 걸 기뻐하고 소중하게 다뤄 주세요.'
한편 괴물은 아이 속에 숨어 있는 충동과 공격성이다. 모든 아이는 괴물이 될 필요가 있다. 아이가 아이답기 위해서는 엄마의 말을 잘 듣는 착한 아이이기만 해서는 곤란하다. 아이는 아직 미성숙한 존재이며 괴물은 충분히 통제되지 않은 미성숙한 자아의 상징이다. 부모가 아이의 내면에 있는 괴물을 부인하고 억압할 때 아이는 위기에 빠질 수 있다. 비록 위험하지만 그것이 아이의 생명력이기 때문이다. 아이가 괴물이 아닌 다른 무엇이 되기 위해선 우선 괴물의 시기를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마르쿠스 피스터의 이 아기자기하고 예쁜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그의 환상적인 그림 때문만은 아니다. 부모들이 늘 고민하는 아이들의 사회화 과정을 짧고 흥미로운 우화로 잘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혼자서 살 수는 없고, 함께 나누는 것이 자신을 위하는 것이라는 단순한 진실. 이 진실을 그저 말로 해준다고 아이가 깨닫는 것은 아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물고기가 주인공인 데다, 이야기는 아이들의 말투로 재미있게 쓰였고, 수채화 느낌의 담백한 그림 위에 홀로그램까지 반짝이니 아이는 이 책에 쉽게 매혹된다. 부모 역시 아이가 유치원에서 친구와 싸웠거나, 친구 때문에 마음이 상했을 때면 이 책이 떠오른다. 어찌 보면 이 책은 아이들이 처음 만나는 윤리 교과서이다.
빨래라는 지극히 일상적인 집안일로 거침없이 상상을 펼쳐 나간 사토 와키코의 이야기 전개는 그야말로 속이 시원하다. 아이를 키우는 과정은 걱정투성이다. 그러나 이 시간은 어차피 지나갈 것이고 아이들은 자랄 것이다. 걱정은 현실을 더 잘 맞이하기 위한 수단일 때만 의미가 있다. 걱정한다고 바꿀 수 있는 일이 없다면 걱정을 멈추려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가진 것도 없고, 믿을 것도 없지만 그냥 배짱을 좀 부려야 한다. “좋아, 나에게 맡겨.” 엄마에겐 배짱이 필요하다. 그리고 배짱 좀 부려도 된다. 세상에 부모보다 자기 자식을 더 잘 키울 수 있는 사람이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앤서니 브라운은 묻는다. ‘이게 이 시대 인간의 모습이라면 차라리 고릴라가 낫지 않을까?’ 고릴라는 단순하고, 본능에만 충실하지만 차라리 더 ‘인간적’이다. 아이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스스로도 행복한 순간을 즐기는 부모, 그 정도면 충분히 훌륭한 부모이건만 우리는 더 대단한 부모를 꿈꾸느라 정작 평범한 부모조차 못 되고 있다.
현실을 이기는 힘, 상상
그림책은 아이들의 일상을 그려야 할까? 아니면 상상 세계를 그려 내야 할까? 이 질문은 잘못된 질문이다. 왜냐하면 아이들의 일상은 결코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사물로만 이뤄진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아이는 자신의 일상 속에서 상상을 경험한다. 때로는 상상이 일상보다 더 중요해 일상은 그저 상상의 소재에 불과한 경우도 있다. 어른이 되면서 다 잊어버리고 말았지만 우리 역시 현실의 틈 사이에 피어오른 상상을 마치 현실인 양 경험하곤 했다.
아이들은 그림을 그리든, 물건을 만들든 그 시기 자신에게 가장 절실한 존재를 담아내는 경향이 있다. 눈사람을 만들 때도 마찬가지다. 친구가 필요한 아이는 친구 눈사람을, 엄마가 필요한 아이는 엄마 눈사람을 만든다. 레이먼드 브릭스에게 절실한 존재는 아빠였다. 그것도 친밀한 아빠다. 자기 일에 빠져 있는 아빠가 아니라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아빠, 아이의 바람을 이뤄 주는 아빠다.
그만큼 아이가 자랐을 때 아빠가 비로소 부엉이 구경에 데리고 나선다. 하지만 아이를 돕지는 않는다. 그저 앞서 걸을 뿐 아이 손을 잡거나, 두려움을 달래 주지 않는다. 심지어 말도 걸지 않고 조용히 스스로 걷도록 한다. 성장이란 자신이 하는 것. 부모는 그저 옆을 걸을 뿐이다. 돕는다는 것은 지나치면 아이를 언제까지나 아이로 머물게 하는 행위이다. 그렇게 만들어 자기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하려는 부모들의 흔한 무의식이다.
레오 리오니의 <프레드릭>은 이 시대 부모의 보편적인 신념을 건드린다. 그 신념을 대표하는 이야기는 이솝 우화에 나오는'개미와 베짱이'다. 지금의 부모 세대 대부분은 이 이야기가 너무나 익숙하다. 당장은 고생하더라도 미래를 준비해야 추위에 떠는 겨울날의 베짱이 신세를 면할 것이라는 경고는 ‘유비무환’이라는 사자성어와 함께 우리 두뇌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현재의 행복은 미래의 행복을 위해 유보해야 한다는 위험한 생각이 이 시대에는 그저 상식이다.
아이는 끝이 두렵다. 아이는 모든 끝이 힘들다. 하루의 끝인 밤이 싫고, 새롭게 다가올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그것을 잘 이겨낼 수 있을까 두렵다. 졸로토가 그린 부모는 이런 아이의 두려움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흔들리지 않는 부드러움으로 아이에게 답을 한다. 무엇이든 끝나는 것은 없고, 끝은 새로운 시작이라고.
아이들이 화가 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화를 내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아이는 화를 내고, 화를 내 봐야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며 화를 다루는 법을 배우게 된다. 세상이 내 뜻대로 움직이지는 않고, 서럽지만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게 된다. 이것은 아이의 몫이다. 누가 말해 주지 않아도 시간을 주면 대부분의 아이는 스스로 깨닫는다. 오히려 왜 화를 내냐고 야단을 칠 때 아이는 배우지 못한다. 자기의 말을 들어준느 사람은 없다는 피해의식과 억울함을 느낀다. 그렇다고 마냥 달래 줄 필요도 없다. 달래 주면 아이는 화를 풀기 위해 늘 누군가에게 의존하려 든다. 아이의 화가 풀리는 데는 그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이처럼 아이들이 경험하는 세계는 현실과 환상이 뒤섞여 있다. 특히 감정이 고양된 순간에는 현실보다 환상이 더 우위에 선다. 상상은 아이들이 세상을 버티고 살아가기 위한 중요한 무기다. 상상을 하면 아이는 자신이 상황을 조금은 통제할 수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되고 이는 아이가 불안을 버틸 수 있는 힘이 된다. 미로코 마치코는 아이들이 세상을 경험하는 특유의 방식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결국 부러움은 허상이다.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열망일 뿐이다. 더 필요한 것은 자신이 가진 것을 소중히 여기는 태도다. 지금의 나를 사랑하지 않고, 지금의 나를 믿지 않으면서 자신감을 갖기란 어려운 일이다. 친구들과 더 가까이 하고 싶은 마음, 용기를 내어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싶은 마음 역시 내 마음이고 두려움 역시 내 마음이다. 싸워 이길 대상이 아니다. 두려움 역시 내 일부이기에 싸워서 떼어 낼 수도 없고 억지로 떼어내려 하면 스스로에게 상처만 남길 뿐이다.
아이들은 어둠이 전혀 없으면 두려움도 없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사실 어둠과 두려움은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 지붕과 벽이 있
어 어둠이 생기지만 지붕과 벽이 있어 우리는 비와 바람을 피할 수 있다. 게다가 밤이 있어 별이 빛날 수 있듯 어둠이 있기에 빛이
있는 것이다. 두려움 역시 우리를 자극해 모험을 만들어 내고 아이는 모험을 통해 성장할 수 있다.
이 아름다운 작품은 분명 그림책의 고전이 될 것인데, 주제 자체는 새로울 것이 없다. 아빠도 엄마도 형도 누나도 두려워하는 검은 개는 두려움에 기대어 점점 커져 간다. 하지만 꼬맹이는 검은 개가 두렵지 않다. 검은 개와 함께 들과 놀이터에서 함께 뛰논다. 두려움으로 커졌던 검은개는 점점 작아져 이젠 빨래 바구니에도 들어갈 만큼 작아진다. 그리고 꼬맹이와 친구가 된다. 아이들은 이 책을 읽으며 가
장 작은 꼬맹이가 가장 큰 용기를 내어 멋진 일을 해낸 것에 무척 즐거워한다. 하지만 그것은 대단한 용기가 아니다. 그저 허상이 만든 두려움을 버렸을 뿐이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아직 죽음보다는 사랑이다. 나를 지켜 줄 사람, 내 곁에 영원히 머물 사람이다. 조금 더 자라면 죽음이 있기에 삶이 더 보석 같은 거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 아이는 자기 내면에 보석을 채워야 한다. 하얀 말과 함께 들판을 달렸던 추억, 화살을 맞으면서 찾아온 하얀 말의 사랑이 그 보석이다. 부모와의 즐거운 시간과 부모의 헌신이 그 보석이다. 그래야 남이 없어도 자기 혼자서 버텨 낼 수 있는 내면의 힘이 생긴다. 그 힘이 생길 때 비로소 죽음이 조금은 덜 두려울 것이다.
오히려 ‘괜찮아’라는 말은 부모에게 큰 위안이 된다. 공동체가 무너진 현대사회에서 부모는 모든 것을 자기 스스로 해야 한다는 압박감 속에 살고 있다. 자신은 한계가 많은데 그 한계 때문에 아이를 제대로 키우지 못하면 어떡할까 두렵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괜찮다는 말을 들을 때 부모는 위안을 받는다.
부모들에게 이 책의 메시지는 강렬하게 다가온다. 아이에게 화내지 않는 부모란 없기에, 아이에게 화를 냈던 순간이 쉽게 떠오른다. 아이가 변한 모습, 아이가 엄마에게 하는 말을 보며 자기 아이도 얼마나 놀라고 속상했을지 생각한다. 미안한 마음으로 아이를 바라보게 된다. 반성하는 마음이 생기면서 그림책의 엄마처럼 아이를 안고 다시 사랑한다 말하고 싶어진다.
마음대로 살던 젊은 시절, 우연히 가지게 된 아이, 그 아이가 과연 내 아이인가 혼란에 빠진 엄마의 모습은 모성 이데올로기에 짓눌려 말하는 것도 억압당하는 이 시대 엄마들의 속내이기도 하다. 모성이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힘겹게 받아들이고, 시간을 통해 만들어 가는 것임을 보여 주는 백희나의 <삐약이 엄마> 역시 대상 독자는 아이라기보다는 부모이다.
아이는 부모를 괴롭히려고 잠을 안 자는 게 아니다. 그저 이 시간을 더 즐기고 싶을 뿐이다. 아이들은 롤라가 하는 행동을 보며 좋아한다. 대리 만족을 느낀다. 그러고는 조금 순해져서 자신은 롤라 정도는 아니라고 말하며 엄마에게 인정받으려고 한다. 부모가 그 말에 웃어 준다면 자기가 사랑받고 있음을 깨닫고 편안해져 잠자리에 든다.
아이는 잠이 들고 싶지 않아 시간을 끄는 것이 아니다. 두려운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하나씩 마음속에 새기면서 준비를 하는 것이다. 새로운 모험을 떠나기 위해선 자신이 잘 알고 있는 것들과의 좋은 관계가 필요하다. 그래서 현실이 만족스럽지 않은 아이는 잠이 들기가 더 어렵다.
나이에 따라 잠자기 그림책은 다양하게 권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아주 어린 아이들에겐 <잘 자요, 달님> 을 읽어 주며 잠드는 것을 도와줄 수 있다면, 스스로 자는 것을 시작한 아이들에게는 타카노 후미코의 <요 이불 베개에게>도 좋다. 이 책은 잠의 세계로 들어가는 아이를 안심시키고 좋은 수면 습관을 만드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조금 큰 아이들에게 어울리는 그림책은 헬메 하이네의 <신비한 밤 여행>이다. 이 책은 상상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아이들에게 꿈의 세계를 제대로 보여 준다. 달초롱을 든 잠이는 모두를 재운다. 음악가도, 힘센 운동선수도, 화가도, 노인도, 광대도, 포수도 모두 재운다. 할머니도 재우고 어린 나도 재운다.
손톱을 깨물거나 정리정돈 안 하는 나쁜 버릇을 고치는 것, 거짓말을 하고 싶은 욕구를 참는 법, 음식을 골고루 먹고 힘든 운동이지만 참고 끝까지 해내도록 하는 것은 많은 부모들이 아이들을 키우며 고민하는 현실적인 내용들이다. 꼭 고쳐주고 싶고 알려 주고 싶은 이런 내용들을 어떻게 말하면 효과가 있을까?
배려란 어린 시절엔 잘 이뤄지지 않는다. 배려를 위해선 더 많은 세월이 아이의 내부에 쌓여야 한다. 트릭시는 제법 커서 네델란드의 외갓집에 여행을 갈 수 있게 되고, 혼자서도 여러 일을 할 수 있게 된 후에야 배려를 하게 되었다. 만약 그 전에 배려를 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배려라는 겉옷을 입은 강요에 불과할 것이다. 부모들은 아이들을 기다려야 한다. 좋은 가치는 그 가치를 갖기 위해선 그만한 시간이 필요하다.